수천 개의 사물들-조나단 굿맨

최울가: 수천 개의 사물들

최울가는 1990년대 초반 및 중반에 프랑스에서 공부한 중견 아티스트이다. 그는 현재 그의 출생지인 서울에 거의 거주하면서 작업하고 있으나, 그는 미국에도 스튜디오를 가지고 있다. 이는 그의 관심이 아시아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의 작품은 전혀 한국의 문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범도시적인 문화를 투영하는데, 이때 많은 오브제와 의미있는 기호들, 그리고 일견 무용지물인 표시 등이 어떤 명백한 의미도 없는 상징들과 결합되어 꼴라쥬 형태로 통합된다. 그의 작품에서 무정부주의는 관계 없는 오브제의 병치에 의해 성취된다; 이 때문에 시각적 흥미가 높아지나 그의 표현의 소외된 거리 역시 나타난다. 최울가의 언어는 국제적이다: 그러나 그의 체계의 무의미성에서는 탈기능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조직화되지 않은 정보의 시인이며, 이때 우리가 보는 많은 것들은 진공 속에서 작용하여 결국 부조리로 귀결된다. 우리가 도시에서 걸을 때 원초적인 에너지와 정보가 사방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경험을 하는 것처럼, 우리는 현실적이고 추상적인 상징과 기호를 현저히 편집한 최울가를 볼 수 있다. 그는 오늘날의 문화의 무정부주의적인 질감을 보는 방식을 제의한다.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방식으로 작업하는 최울가는 그 자신을 세계주의자의 방식에 내맡기는데, 이러한 방식은 도시생활의 비합리적인 성격의 스토아적 수용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의 두 가지 주요 작업 체계인 “화이트 시리즈”와 “블랙 시리즈”는 무작위적인 시각적 효과의 수용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며, 다만 시리즈 명칭은 배경이 각각 밝거나 어두움을 함의한다. 유형은 시작하다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들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곡선, 독립적인 숫자나 글자, 도상 등으로 구성된다. 인간의 모습은 이들 회화 작품의 텍스트 속으로 길을 찾아가나 무의미한 상징들의 대대적인 침투에 의해 압도된다. 어떤 점에서는 우리는 거부의 이유를 발견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 이유는 어떤 것도 천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들 회화의 포괄성은 평가되어야 한다--너무 많은 재료가 구성 속으로 들어갔으며 그래서 우리는 장면들이 현대생활의 밀집된 성질을 이러한 삶을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전달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럴 수 있다. 다만 그토록 많은 인공물들이 들어찬 공간 내에서 최울가는 의미의 열쇠를 찾고 있을 수 있다. 그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위안을 삼는 것은 우울하나 분명히 현대적인 상황이다. 시각적 효과의 축적으로 인해 상황을 분명히 읽는 것이 불가능해지며, 그 결과 아티스트나 관객이 그들이 직면하는 인공물의 광기에 대한 통제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회화 작품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여기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없다.

동물들, 즉 고양이와 개들은, 그리고 한때 꽉 닫은 병속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보인 물고기들은 도시의 공허한 광경에 존재하나, 그것들은 거의 보호자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것들은 그냥 그곳에 있으며, 혼자 있고 그리고 보다 큰 그러나 희망이 없는 집단 속에서 고립된 존재들이다. 아마도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한 허무주의적 기분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거기에는 너무도 많은 물질들을 관통하는 우리의 길을 만들 때 느끼는 어떤 쾌락이 존재한다. 그러나 빈 거래 – 경제적, 정서적 측면 모두에서 – 에 대한 현대적인 삶의 거대한 능력은 여기서 회화 그 자체의 반복에 의해 강조되는 것 같다. 이러한 삶은 다양한 특수성들을 봉합하지 않은 채 전달된다. 때때로, 작품의 분위기는 서정적이면서 절제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든 늪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우리가 우연히 한국의 위대한 고전문화로부터 상상할 수 있다. 한국의 고전문화는 최울가의 작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없는 예절과 도덕적 고결성을 상정한다.) 그렇다고 하여 회화 작품들이 그 스스로 무의미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신에 그것들은 절대적으로 모든 것들이 판매되는 시대에서 문화의 무의미성을 예시한다.

오늘날 문화가 가장 낮은 공약수에 의해 활성화되는 단일체가 맞다고 하면 어떻게 미술작품이 어떤 고양감이 느껴질 수 있는 정도로 만들어질 수 있는가? 최울가는 거의 의지하지 않으나 자신이 알고 보는 것을 반복한다: 방대한 오브제들은 서로 결합될 수 없으며 그 결과 예술이 불투명한 비전과 사실주의를 시사한다. 변형에서 어떤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신에 훌륭한 보고 같은 느낌이 든다—그리고 최울가는 현재의 삶을 불연속적인 유형, 상징 및 사물들의 백화점으로 읽어내는데 일관되게 흥미를 자아내고 심지어는 영감을 준다. 매체의 불연속성이 우리들이 서울이나 뉴욕 등에서 경험하는 정서적인 삶의 종류에 관해 판독한다고 주장될 수도 있다. 최울가는 중요한 화가이다. 왜냐하면 그는 도시생활의 그래픽적인 불쾌감에 포장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우리가 아는 한 시각적 질감의 많은 순수한 측면들에서 올바르게 반항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정부성을 함께 결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있는 그대로에 대해 감상할 수 있다: 그 자체로 차이에 대한 축하이다. 오늘날 대개 우리들을 회피하는 일관성의 부재에서 이것은 충분함 이상의 의미가 있다.

조나단 굿맨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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