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세계 - 윤범모(평론)

선들이 난무한다. 직선의 향연이다. 거의 무의식의 세계에서 그어진 어떤 흔적과 같다. 그것은 곧 자유자재이다.

 

하여 선들은 나름대로 리듬을 동반한다. 내재율이다.

 

 

최울가의 근작에서 나는 어떤 울림을 느낀다. 직선의 성격이란 것이 대개 날카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기 마련인데, 이 경우는 좀 다른 분위기를 떠오르게 한다. 나름대로의 변화감 때문일것이다. 직선들의 사이에 어쩌다가 원형이 나오는가 하면 캔버스의 양측에 직사각형의 평면이 등장된다.

 

 

이 사각형의 면은 자유분방한 선을 제어하려는 표현과 같다. 중앙의 분출을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하는 하나의 제방과 같은 것이다. 직선이 가지고 있는 분방함과 사각형의 대비는 화면의 무게에 도움을 준다.

 

 

원래 다채로운 원색을 구사하던 최울가는 근래 색채와 면 처리를 억제하는 화면효과를 얻고 있다. 낙서처럼 무심으로 이어진 선들, 그것은 자유의 흔적이리라. 그 선들은 무심코 그어진것 같아도 상호 조화를 이루면서 내재적인 선율을 타고 있다. 현대음가의 예리한 금속성을 듣는 것처럼 강한 인상을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종합적으로는 부드러운 분위기로 이끈다. 전체적으로 원초성을 기본으로 하여 상호간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최울가의 근작에서 볼 수 있는 주제의식은 곧 자유의 구가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가식이 없는 세계, 바로 원시성을 희구하는 자세에서의 산물이다. 실제로 작가는 고대 원시인의 지적 수준을 염두에 두고 무심으로 작업을 수행하고자 했따. 아무런 꾸임이 없는 자연상태를 그대로 표현하려했다. 아마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프리미티브"일지 모르겠다.

 

 

하여 그는 구석기시대 벽화에 나타난 것처럼 마치 원초적 영혼을 화면에 담으려는 것 같다. 무심히 그어댄 낙서와 같기도 하다. 어쩌면 어린 유아들의 심정 즉 동심의 시각으로 본 세계의 형상화와 상통하기도 한다. 분별력이 부재한 순수의 세계이다. 무의식의 놀이일지 모른다. 이같은 효과는 장 뒤뷔페와 맥락이 상통할지도 모른다.

 

 

근작의 세계와 만나기까지는 작가는 각고의 세월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최울가는 근래 5년 가량의 탐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 여행에서 얻은 결과는 새로운 재료와 기법에 의한 조형방법이다. 하여 예전의 화려한 색채에 의한 평면에서 보다 정제되고 꾸밈이 없는 단조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는 새롭게 도달한 프리미티브의 세계로서 기왕의 주제와 조화를 시킬 수 있었다.

 

 

아크릴 물감의 얄퍅한 재료의 성질이 싫어 그는 화면 전체에 모노크롬 형식에, 두터운 질감을 활용했다. 바타은 하나의 여백으로 처리를 했고, 주로 바닥을 긁어내어 형상을 이끌어내었다. 직선의 향연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거기에 작은 점들의 오브제를 사용했다.

 

 

캔버스 작품의 옆면 즉 액자부분의 5-15cm 의 두께를 주어 입체화를 시도한 것은 하나의 특징이 된다. 두터운 옆면은 전통적 액자에 의한 강박관념을 깨버리려는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전면에서 측면으로의 시선 이도은 이 그림의 무한성을 감지하게 한다. 정면의 심상은 자연스럽게 측면으로 이어져 시선을 확대 혹은 연장시키는 효과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선이 가지고 있는 단순성을 고려한 이같은 측면 작업은 보다 복합적인 긴장과 이완의 역할을 부여하게 한다.

 

 

최울가의 유화는 두터운 유화물감의 사용에서 또 다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는 두터운 유화물감이 보통 20일 이상(겨울에는 1개월 이상) 마르지 않는 바,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작업의 진행상 두터운 물감의 속성 건조방식은 그야말로 발명특허 감일지도 모른다. 이 같은 새로운 방법은 그이 작업량과 비례하여 왕성한 성과로 이어진다.

 

최울가, 그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무엇을 추구하는가.

 

"20대 초반의 사실적인 그림과 더불어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을 그리다가 생활고에 시달렸던 20대 말과 30대 초반에는 주로 청색 빛을 소외된 사람들의 삶과 예술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주변인물을, 다음에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그러니까 문명을 아주 무시한 채 오직 자연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간의 삶과 생각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또 다시 나의 생각에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인간이 생활하는 이 땅을 문명의 발전이 어쩔 수 없으며, 그것들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면 자연과 문명이 교차되는 지점에 너무나 많은 문제점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지식적인 문명이든 물질적인 문명이든 이 모두를 자연의 소리와 형체, 그리고 움직임에 맞추지 않는다면 자연도 인간도 병들어 갈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문명을 -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어떻게 자연과 같은 모습으로서의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오늘 나의 그림에 대한 사상을 한 곳에 묶는 큰 과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림 자체는 세계성에 따라야 한다는게 내 주장이다. 열심히 진실하게 그려나가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림 그 자체는 조형과 공간, 색과 선, 전체 화면이 주는 이미지가 21세기를 먼저 달릴 수 있는 창조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1991)

 

 

최울가의 육성이다. 인용문이 다소 길어졌지만 그의 내면풍경을 짐작하게 하는 좋은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자연이란 의미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표명했다. 자연과 같은 모습, 이는 그가 추구하는 세계의 토대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계성을 방기하지 않으며, 더불어 회화로서의 기본적인 요소까지 아우르고자 했다.

 

 

원시성은 곧 현대인에게 영혼의 모음처럼 다가온다. 파리와 뉴욕 그리고 서울을 왕래하며 작업하는 최울가의 근작에서 자유의 소리를 듣는다. 원초적인 모음을 듣는다. 이는 도시 문명의 현장에서 듣는 인간의 원초적 모음인지도 모른다. 이같은 모음에서 자유를, 그리고 원초적 순수를 만나게 한다. 최울가는 보다 어눌해도 용인되리라. 도시의 한 복판에서 말을 더듬거리더라도 무관하리라. 하지만 그의 발음 속에 묻어 있는 모음은 현대인의 또 다른 얼굴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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