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울가 작품에서 (다시) 근원적인 질문을 찾아 - 임창섭(문학박사, 미술평론)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과연 내가 살고 있기나 한 건지 불현듯 회의가 드는 순간이 있다. 어느 현상학자의 말대로 단지 내가 살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는 것 일뿐인지는 몰라도 집요한 사고(思考) 행위를 요구하는 질문에는 쉽게 한계를 느껴 회피하고 싶어지는 것은 이해 가능한 일이다.

그림 그리는 행위에 대한 역사적 혹은 개인적 이해를 위한 인식 역시 위와 같은 의문들처럼 회피대상이 되기 쉽다. 고상하게 표현하면 예술작품의 생산행위 쉽게 말하면 그림을 그리는 노동은 어떤 정의 속에 들어가야 하는가라는 진지한 질문과 이에 대한 대답을 추구하는 줄기찬 노력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요즘에는 점점 더 엇나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빗나감에 대한 증거는 우리의 삶과 예술의 원초적인 질문은 사라지고 표피적이고 일상적인 감각을 쫓는 작품들만 드러나고 있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잘 꾸며진 거실에 어울릴만한 것들 혹은 깨끗하게 신축된 건물의 로비에 걸릴만한 것들만 생산되고 또 그런 것들만 찾는 요즘이다. 내 머리 속을 망치질 할, 우리의 가슴을 잘 벼린 칼로 후벼낼 작품이 생산되길 기대하는 일을 현대적인 삶에 대한 형식의 거부로 치부되고 마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 기준을 정하기 어려운 현대이다.

최울가 작품은 화면에 빼곡히 들어찬 선으로 구성된 형상들 보다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에 먼저 관심이 간다. 다양한 색으로 밑칠이 된 캔버스 위에 다시 하얀 바탕색을 칠한다. 그리곤 그 위에 선으로 형태를 그려내면 하얀 바탕 속에 숨어있던 또 다른 화려한 바탕색이 드러난다. 이것은 숨겨진 혹은 잊어버린 과거를 현재의 행위로 드러내는 최울가 작품의 가장 근원적인 생산방법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서 과거를 드러내는 기본적인 즉 근원적인 방법이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흔히 시간의 흐름은 단선적이기에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과거는 확실하다는 믿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과거는 이미 지나버린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은 아마 기본적인 믿음 혹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리라. 과거는 이미 경험했던 일이기에 모두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다는 것이 어떻게 규정되느냐에 따라 그 생각은 바꾸어야만 한다. 안다는 것 즉 과거에 대한 인식이 누구나 동일하다면 이 상식은 맞다. 만약 모두가 과거를 동일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인류가 지나온 과거에 대한 기록은 한가지 밖에 있을 수 없다. ‘조선사’도 하나이고 ‘고려사’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한국사’, ‘중국사’, ‘미국사’, 어느 나라나 그 역사 기록물은 하나로 족할 것이다. 하지만 실재로는 많은 역사서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또 다른 차원의 인식으로 미쳐 알려지지 않았던 과거를 재생산해낼 것이다. 한 사람의 행위 혹은 한 나라의 행위가 수많은 사람과 많은 나라들의 행위와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그 행위와 이해에 따라 과거 즉 역사는 새로 서술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거는 미래와 같이 미지의 부분으로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식으로 바탕색을 표면 위로 끌어내는 최울가의 작품생산 방식을 고찰하면 그것은 우리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그리고 과거의 흐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인 것처럼 여겨진다. 인식에 대한 의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 대해, 흘러간 시간에 대해 알고 있다고,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하는 인식에 대한 재고를 하게 만드는 것이 최울가 작품의 유효성의 하나이다. 어쩌면 이는 과거의 시간을 그리는 행위가 아니라 과거를 인식하는 행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과 질문에 대한 최울가만의 특별한 의미-이미지(double meaning-images) 생산일지 모른다.

최울가의 작품에서 바탕을 뚫고 나온 지나간 시간들의 흔적들은 정형화된 형태와 사물들이 아니다. 약화되고 약된 이 형태들은 아이들 낙서처럼 편안하게 캔버스 공간을 부유한다. 이 같은 선들의 부유는 회화가 사물을 사물답게 그려야 할 이유도 사명감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회화는 어쩔 수 없이 재현의 평면공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림이 평면에 그려지는 한 현실이든 비현실이든 재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회화의 ‘사실주의’(Realism), 상식으로서 혹은 미술사적 해석에서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사실주의는 원천적으로 왜곡을 포함하는 모순을 지닐 수밖에 없다. 회화의 평면성과 현실의 입체성 관계에서 비롯되는 역설이다. 적어도 서양미술 역사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동양화(지역적 범위를 지칭하는)는 아무리 현실을 그대로 모방하려한다 해도 그 역설적인 모순을 정언(正言)으로 바꾸려는 무도하기 짝이 없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가 발명한 원근법은 이런 무모한 시도의 대표적인 발명품이다. 가까운 것은 크게, 멀리 있는 것은 작게 그리는 원근법은 또 다른 현실을 아니 사실을 왜곡할 뿐이다. 멀리 있다고 해서 가까이 있는 것보다 실재로 작은 것은 아니고, 가까운 길보다 멀리 있는 길이 실재로 폭이 좁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클 수도 있고, 더 넓은 길일 수도 있는 것이다. 현실 혹은 실재가 그렇다는 것이다. 만약 살고 있다는 것마저 상상(想像)이라고 회의를 품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현실을 현실대로 그려내려는 이 방법은 또 다른 왜곡을 만들어 내고 만다. 따라서 그리스 모방론에서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사실주의까지 이르는 온갖 기술적 혹은 회화적인 기법은 동양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사실주의를 다시 정확하게 재정의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상학자 후설은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부분일 뿐이다. 전체는 그 자체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마음속에서 종합되어 생겨난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후설을 거들먹거리지 않아도 이미 과학적 혹은 생물학적 차원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쉬운 예를 들면 이렇다. 원뿔은 정면에서는 삼각형으로 보인다. 위나 아래에서는 원형으로 보인다. 원뿔을 이처럼 보이는 것만으로 인식하면 그 인식은 원뿔의 전체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 된다. 따라서 원뿔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 지점에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시점, 혹은 여러 면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지점을 골라야 하며 이를 마음속에서 종합적으로 인식하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파가 보다 정확한 사실주의라고 주장하는 것도 그다지 억지 주장은 아니다.

시간과 인식 그리고 그것을 캔버스에 옮겨내는 형태들이 바로 과거에 대한 사실주의 추구가 최울가 화법의 근원인 것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숨겨진 혹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억은 그 누구도 완벽한 사실을 말할 수 없다. 다만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 기억은 다르게 기록된다. 최울가의 그림에서 그것이 자신만의 혹은 오롯한 기억에 대한 기록 방식일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림이란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파악한다면 자신만의 사실주의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요즘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해서 우리들의 말초적인 감각도 누그러지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만큼 더 퇴폐적이고 유희적인 신경은 나날이 기세등등한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들 삶에서 결코 사실이 아니다. 우리들 삶의 근원적인 모습이 아니다. 다만 지나가는 현상일 뿐이다. 이런 현상에 휘둘려 자신의 그림 그리는 행위에 대한 고민과 회의가 없다면 그것 역시 회화의 사실주의는 없다. 스스로에게 해답을 찾으려는 노동의 행위가 없다면 그것은 그림 그리는 아니 예술행위로서는 의미가 상실되는 것이다.

최울가의 작품이 적어도 자신이 겪어낸 과거의 시간에 대한 사실주의를 보여주려는 예술노동 행위는 그것은 결코 허무한 행위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주 사소한 삶이란 없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이 없어져도 괜찮을 만큼 의미 없는 시간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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