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울가의 회화 - 유아적이고 서사적인 그림일기 -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독일의 미학자 쉴러는 <미적 교육론>이란 저작에서 인간의 심성을 이성충동과 감성충동으로 구분하고, 이 두 충동을 매개시켜 완전한 인격체로 이끌어주는 제3의 계기를 유희충동이라고 일컫는다. 이성충동과 감성충동이 일정한 목적 지향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음에 반해, 유희충동은 목적보다는 과정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충동의 가장 순수하고 순진무구한 형태를 지향한다. 이로써 저자는 미학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예술의 원동력을 이러한 유희충동에서 찾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논법에 비추어볼 때 유희충동은 예술의 계기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인격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삶의 계기 혹은 존재의 계기이기도 하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놀이와 유희는 게임과는 다르게 결정적인 규칙이 없다. 외관상 규칙이 있을 때조차 그것은 다만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일 뿐, 그 규칙이 놀이와 유희를 통한 순수한 즐김과 향유를 제어할 만한 구실이 되지는 못한다. 예술에서의 형식이 그렇듯 그 규칙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기보다는 놀이 주체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 자기 외부로 밀어 올려진 것, 다만 놀이를 더 잘 놀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 언제든 수정되고 보완되고 파기되고 고쳐 잡을 수 있는 계기에 다름 아니다.

놀이와 순수는 이처럼 같이 간다. 그리고 적어도 외적으로 볼 때 그 논법 즉 놀이와 순수의 등식에 가장 근사한 형태가 아이들의 낙서그림이다. 대개는 자신이 보거나 상상한 것을 최소한의 선으로만 간략하게 표현하기마련인 낙서그림은 비록 최소한의 형식이지만 그 속에 사물의 본질(이를테면 구조와 같은)과 심지어는 그 사물에 대한 순간적인 그리고 때로는 지속적인 주체의 감정마저 고스란히 담겨진다. 문명의 여명기에 해당하는 구석기시대의 암각화나 동굴벽화가 이러한 낙서그림(삶의 여명기가 낳은 그림)의 원형을 예시해주며, 또한 이는 그대로 현대미술에서의 드로잉의 경향성이 강한 회화에로 이어진다.

최울가의 그림은 한눈에도 이러한 구석기시대의 암각화와 유아들의 낙서그림 그리고 드로잉의 경향성이 지배적인 회화에 맞물린다. 그리고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 경향의 다양한 지점들, 이를테면 프랑스 자유구상의 장 뒤뷔페와 피에르 알레친스키와 로베르 콩파스, 미국 낙서회화의 케이스 헤링과 장 미셀 바스키아와의 일정한 영향관계나 친족성이 확인된다. 이 영향관계를 바탕삼아 자신만의 독자적인 회화를 추슬러내고 있는 것이다.

최울가는 캔버스에 안료(대개는 흰색)를 두툼하게 발라 올린다. 그리고 안료 층이 채 마르기 이전에 그 끝이 뾰족한 도구를 이용해 드로잉을 한다. 비록 그 두께가 미미하긴 하지만, 그 방법이 암각화나 저부조의 그것을 닮았다. 그리고 다른 안료나 크레용 그리고 파스텔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데, 대개는 어떠한 형식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드로잉이나 선묘의 어우러짐을 보여준다.

이 일련의 그림들에선 비록 일정하게 양식화되긴 했으나, 유아의 낙서그림에 나타난 제반 특징이 그대로 확인된다. 이를테면 원근법이나 명암법과 같은 재현회화에서 요구되어지는 문법들이 해체돼 한눈에도 평면화의 경향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말하자면 그림에 등장하는 제 요소들, 시계나 화병 그리고 피아노와 같은 일상적인 기물들, 물고기나 개와 같은 동물들, 차나 기차와 같은 운송수단들처럼 일견 무관계해보이는 것들이 화면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공존한다. 일상적인 맥락과 상식적인 맥락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여기에다 상상력에 연유한 공상적 비전마저 끼어들기에 주저함이 없다. 캔버스를 앞에 두고 떠오르는 공상들(이를테면 일전의 여행에 대한 회상과 같은)과 눈앞에 보이는 사물들이 하나로 섞인다.

나아가 그림에 등장하는 제 요소들 간에 선후나 우열과 같은 의미나 비중의 차별조차 없다. 무관계한 사물들, 그 강도나 의미나 비중에 있어서 구별과 차이가 없는 사물들이 마치 진공 상태의 무중력 공간에서처럼 평면 위를 부유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인간이 불행한 원인이 지식에 기인하며 또한 지식은 구별에 연유한 것이므로 그 구별을 철회할 때(넘어설 때) 비로소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는 노자의 전언을, 모든 구별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라는 푸코의 전언을, 그리고 유아가 상상계로부터 상징계(상징과 언어를 매개로 한 차이와 구별의 단계)로 건너가기 이전의 무구별의 자족적인 단계에 대한 라캉의 전언을 비전으로써 보여주는 것 같다. 물론 작가의 그림을 이러한 인문학적 성찰에 따른 심각한 자기반성의 논리적인 귀결로 보기에는 다소간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여하튼 적어도 작가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무의식적인 층위에서나마 공감하고 있으며, 더욱이 이는 무엇보다도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한 비전(혹은 형식파괴에 대한 욕망?)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처럼 화면을 온통 가로지르는 선들, 그리고 그 선들이 모여 암시되는 기물들이 그림의 평면성을 강조하면서, 또한 한편으로는 평면 바깥으로까지 확장된다. 즉 화면 자체가 완결된 느낌으로서보다는 잘려져 나간 느낌, 전체로서보다는 부분을 보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자기 외부로까지 무한정 확장되는 그림, 현실로부터 그 부분을 떼어낸 듯한 그림에의 인상이 바로크회화와의 연관관계를 떠올려준다(르네상스 미술은 자족적이고 완결된, 그리고 바로크미술은 확장적인 형식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심지어 작가의 그림은 화면 측면의 프레임에로까지 확장된다. 캔버스 자체를 어떤 이미지를 위한 배경으로서보다는 그 자체 자족적인 존재성을 인정한 것이다(이를테면 캔버스 자체를 오브제의 한 형식으로 보는). 전통적인 프레임의 경계를 허물면서(그림의 바깥으로 마구 확장되면서) 강조하는(캔버스 고유의 물성을, 틀의 한정을 인정하는) 중의적 의미를 실현한 것이다.

때로 작가는 이처럼 그림 바깥에로의 무한정 확장을 암시하는 화면을 제어하기 위해 일정한 조형장치를 마련하는데, 주로 근작에서의 화면의 가장자리 전체나 부분을 감싸고 있는 색면이 그것이다. 부분적으로 도입된 색면(정적 장치 혹은 요소)으로써 작가의 그림을 관통하는 특징인 드로잉 즉 분방한 선(동적 장치 혹은 요소)과 대비시켜 화면을 조율하는 것이다.

 

최울가의 그림에는 놀이와 몽상을 지시하거나 암시하는 제목이 많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작가의 그림을 지지하는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놀이는 가급적 외부로부터의 인위적인 형식이나 화면 조성을 피하고 내적 계기나 내적 필연성에 의해 저절로 촉발되어지는 그림을 지향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반영한다. 그리고 이는 마치 어린아이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격이 없고 자유분방한 드로잉 그림으로서 나타난다. 화면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일상이나 상식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서로 무관계한 것들이지만 작가의 상상력을 매개로 서로 어우러짐으로써 구무별의 천진난만한 세계상을 드러내 보이고, 초현실주의의 사물의 전치에 연유한 예기치 못한 비전을 열어 보인다. 작가의 그림을 지지하고 있는 또 다른 핵심개념인 몽상이란 이처럼 일상과 이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논리와 논리적 비약이 그 경계를 넘나드는 비전을 의미한다.

그 비약, 그 비전을 통해서 작가는 일종의 유아적이고 서사적인 그림일기를 풀어내며, 어른을 위한 동화 즉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이야기를 암시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상실한 것들, 잃어버린 것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되돌아보게 하고,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했던 시절에의 그리움 속에 빠져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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