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本鄕)을 향한 열망 - 최근 최울가 회화의 비약 - 이희영, 미술평론가 아트네시각매체연구소 연구원

1979년 "대망의" '80년대를 앞두고 최울가는 전문 미술가로서 자신의 예술적 기획(artistic enterprising)이 드러나는 첫 개인전을 비유와 서술에 의존하는 초현실주의적 암시로 채웠다. 그것은 부산에서 열렸다. 1990년대 10년간 그는 평평한 표면에 밀착하는 이미지를과 불분명한 윤곽의 형태들로 사사로운 삶의 흥겨움이 가득 넘쳐나는 화면들을 파리에서 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그는 면적을 갖는 형상(figure)을 포기한 채 상형문자나 기호와 같은, 축약된 선적 형태(form)의 나열과 캔버스 전체의 규격을 강조하는 비약을 뉴욕에서 시도했다.

30여년의 예술적 이력에서 보이는 이들 다양한 변화 속에서 그의 회화들은 줄 곧 "자유로운 프리미티브"(윤범모), "즐기기 위한 놀이"(김종근)로 혹은 "생뚱"맞음(김형순)으로 읽혀진다. 이들 지적은 최울가의 회화에 대한 긍정적 기대에서 비롯된 듯하다.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등과 같은 격변하는 사회적 실험이 최울가를 비롯한 그의 이웃들은 기억한다. 미술가 자신은 그 변혁 속에서 스스로의 예술적 기획을 위해 10년간 주기로 문명의 극단적 실천이 행해지는 장소들에 자신을 내던지며 자신만의 반응으로 회화를 제작해 왔다. 이 평가들에서 나는 사회적 실험과 문명의 극단적 실천에 근본적으로 내재된 병리적 현상을 미술이, 그것도 회화가 치유해야 한다는 당위론을 엿본다. 거기에 천연덕스러운 최울가의 회화의 외관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그 기대가 가능했을 것이다.

 

 

회의

최울가에 의하면 자신은 1980년대에는 "자연과 상응하는 인간의 투명한 의식"으로 대상을 보고 회화를 제작했다면 "1990년대는" "회화의 근본적 도전"과 시도를 위해 "여과 없이" 자신의 삶과 "모든 마음의 언어를 몽땅" 화면에 "풀어 놓음으로써 전쟁과 마그마와 같은" 실천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00년대에 파리에서 뉴욕으로 제작실을 옮기면서 "숨 쉴 틈 없이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표현했던 자신이" 당시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국면에서 "좌절"을 경험했다고 한다. 미술가로서 스스로의 삶을 꾸려온 신념을 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것을 뉴욕은 그에서 요구한 것으로 비친다.

한 미술가가 새로운 양식과 새로운 형식으로 자신의 동질성을 주장하려 할 때 심각한 고립에 빠진다. 그는 그를 인정해온 이웃의 시선이 염려로 바뀌거나 심지어 외면하는 멸시에 직면한다. 최울가는 그 국면에서 벽에 기댄 캔버스를 향한 거침없이 돌진했다. 그와 같은 집중을 위해 자신의 삶과 이웃을 등 뒤에 두었다. 회화의 전형적 속성인 칠의 특성(the painterly)이 표면을 덮고 채우는 것에서 출발하듯 최울가는 그 때까지 자신이 분투해온 경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 "왜 모든 것을 다 표현해야만 하지?"

이는 회화의 본질적 성격이 지닌 모순을 정확히 지적하는 그의 통찰이다. 뉴욕에서 최울가는 그간 자신이 몰입하고 희생한 모든 것이 회화의 가능성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고 보면 이 회의(懷疑)는 회화가 칠이라는 물리적 실체에 의존함과 동시에 그 표면 너머의 비현실적 이미지에 의존해야 하는 모순을 직시한 결과이다. 회화는 또한 칠로 채워짐으로써 완성된다. 최울가는 그렇다고 새로운 자신의 매체를 미니멀 미술에서처럼 비우는 것으로, 혹은 개념 미술에서처럼 칠하는 노동을 포기하는 것으로 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철저하게 칠과 캔버스, 그리고 구조와 같은 회화적 속성(pictoriality)에 주목하고 그것을 실험했다.

 

규격

2000년대 뉴욕에서 제작되는 화면은 캔버스 전체의 형태(shape)와 현실에 실재하는 화랑 공간 간의 관계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캔버스 가장자리의 두께를 강조하거나 그 두께에까지 칠(paint)을 지속시킨다. 캔버스의 가장자리와 그 두께에 대한 주목은 곧 회화의 환각적 영역(illusion space)과 관람자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실재하는 공간(real space) 사이의 첨예한 접점을 부각하고 그에 따른 경계의 애매함을 지적한다. 캔버스 아래로 떨어지는 벽면의 그림자를 실재하는 것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회화의 영역으로 봐야할지 하는 판독의 문제를 남기기 때문이다.

이를 때 그의 캔버스는 크기(size)에 반응하기보다 규격(scale)에 반응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과거 그의 그림이 그의 말대로 "투명한 의식"으로 분출하는 "마그마"와 같은 분투의 장이었다면 이는 사각형의 화면 내부에 한정된 의식이고 분투였을 것이다. 회화의 영역과 실재하는 영역의 대비를 포함하는 최근 그의 회화들을 볼 때 과거의 그림들은 이미지에 한정된 삽화처럼 보이게 된다. 과거의 그림들이 표면 너머의 환각에 의존한 영역에 한정된다면 최근의 것들은 환각의 이미지 영역과 표면을 둘러싸고 있는 물감의 물리적 실체와의 충돌을 포함하는 지점까지 확장된다.

변화된 최울가의 캔버스는 그 표면에 그려진 형상에서도 과거와 구별된다. 최근 연작에서 그는 주변에 보이는 잡다한 사물들이나 마음에 품은 것들에서 비롯하는 여러 대상들을 빠른 속도의 간결한 선들로 제시한다. 이는 사물의 윤곽을 설정하고 그 내부를 색으로 일일이 덮는 과거의 것과 차이를 갖는다. 짐승의 주둥이를 주로 암시하는 톱니 형태(form)의 뾰족한 모서리의 돌출, 두 세 가닥으로 물결치는 평행선의 반복, 골격으로 축약된 인체와 짐승들의 부유, “W”자 형의 선으로 암시되는 엉덩이의 움직임, 애벌레의 무수한 발이나 단세포의 섬모와 같은 점선들의 반짝임, 구불대는 나선의 메아리, 이들 모든 이미지들이 사물을 설명하기보다 사물의 특징만을 암시하는 드로잉에 의존해 있다.

이들 형상은 화면의 특정 부위를 중심으로 계층적으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 무작위로 그리고 대등하게 골고루 화면 전체에 펴져 있다. 따라서 관람자는 그의 화면에서 기승전결 혹은, 강중약과 같은 의도된 구성의 조화를 볼 수 없고 오히려 캔버스 전체의 형태가 실재하는 현실의 공간을 당당하게 점유하는 존재감을 감지하게 된다. 이는 캔버스의 규격을 보증하고 더 나아가 매체를 즉각적으로 경험하는 바로 그 시각적 사실을 강조하게 된다. 최근 회화들이 경험의 직접성에 의존한다면 과거의 회화들은 진중한 사건의 전개가 암시된 이미지의 점진적 판독에 의존한다.

 

반전

이제 그의 회화는 표면에 한정된 이미지의 에피소드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실재로 살아 있는 관람자의 시각적 직접성의 조건을 문제 삼고 있다. 개별 형상들이 떠 있고 각각의 다양한 음성을 한 곳에 한꺼번에 쏟아 내는 소음은 캔버스의 네 가장자리를 반복하는 구조 위에 대비된다. 태무심하게 자리 잡은 사각형의 색면와 함께  사람의 몸통, 시계, 테이블 등의 형상이 수평선과 수직선의 결합에 의존하고 있다. 수평선과 수직선의 반복되는 격자 구조는 그 소음을 극대화하는 대비로 단정한 시각적 외관을 띤다. 여기서 최울가의 매체는 하나의 단선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조화로운 구성물이라기보다 오히려 상반된 속성들의 충돌을 위한 기회의 영역임이 확인된다.

최울가의 최근 연작에서 드로잉에 의존하는 형상들 대부분은 캔버스를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행위를 극명하게 기록한다. 과거의 회화들이 거의 붓에 의존한 칠로 그 형상을 드러내는 것과 이는 차이를 띤다. 2000년대에 제작된 회화는 어두운 색의 바탕 위에 올린 흰색의 표면을 칼이나 딱딱한 재료로 그음으로써 그 형상을 드러낸다. 형상은 뒤로 밀려들어가는 배경에 대비해서 앞으로 돌출하는 시각적 자극이다. 이는 이미지 제작의 기본이 된다. 최울가는 마음에 둔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 조각하듯 표면을 파냄으로써 자신의 몸짓을 남긴다. 재료를 능가하는 표현 의지의 분출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의 형상은 본래의 바탕을 회복시킴으로서 가능해진 셈이다. 이는 곧 돌출해야할 형상이 밀려감으로써 성취되는 과정을 보인다. 여기에 형상과 배경의 충돌이 목격된다.

축약된 드로잉에 의존한 형상들의 포괄적 균질, 캔버스 그 자체의 규격에 관한 관심과 실재하는 공간의 적극적 도입, 개별적 속성들을 죄다 인정하는 형상들의 다양한 아우성이 드러내는 자유로움, 밀려가야할 배경을 노출시킴으로써 부각되는 형상의 반전, 이들은 최근 최울가의 회화적 비약을 특징짓게 하고 또한 그가 뉴욕에서 처음 직면했던 회의와 그에 따른 그의 실천을 요약해 준다.

 

회복

최울가의 도약을 가능케 한 이들 실험의 핵심은 전체의 통합에 어울리는 개별의 구성보다 그 개별의 상반된 속성들 간의 충돌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편 이미지 중심의 과거 회화와 관람자 중심의 최근 회화를 구별되게 하는 반면, 다양한 변천과 전개 속을 관류하는 그의 일관된 회화적 실험과 방향설정에 의해 도달한 것으로 생각된다. 유아기의 추억을 자극하는 소재의 선호와 단순한 색조의 적용, 그리고 즉흥적 드로잉과 칠의 태무심한 나열은 지난 30여 년간 그가 유지해온 회화적 특성이다. 그가 항상 습관적으로 불현듯 제시하는 형상들 간의 생경한 대비는 그의 비약을 가능케 한 상반된 요소들 간의 충돌과 흡사하다.

이 생경함은 소재가 암시하는 천진난만함과 함께 줄곧 해학으로 매 시기마다 읽혀왔다. 더욱이 과거의 회화에 적용된 원색과 질퍽한 칠은 시각의 단순함과 촉감의 원초적 감정에 걸맞고 성공적인 원시미술의 거장을 연상하기까지 한다. 지금까지 제작된 그의 회화를 접하는 관람자들은 한 결 같이 문명 비판적 암시를 지적해왔다. 최울가의 초기작이 초현실주의적 영향에서 출발하는 것에서 보면 생경한 요소들의 대비는 그에게서는 꽤 뿌리 깊은 예술적 전략으로 보인다.

최울가는 자신의 회화적 실천과 함께 "무중력주의"를 주창한다. 그에 의하면 이미 무중력이 있었고 그것이 중력에 가려져 질서로 모든 것이 규정되었단다. 하여 그는 현대인의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 본래 있었던 무중력의 세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범우주적 진실에 대한 주목을 통해 현실의 고정관념을 타파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지하통로로 운반하고 알프스의 공기를 통에 담아 파는 파리의 사례를 말하고 카페에서 구두와 악세사리를 파는 뉴욕의 사례를 지적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믿음은 이미 있는 것에 대한 직시와 긍정의 방법론을 갖고 있다. 그는 본래의 것, 본래의 곳, 본래의 때를 향한 열망을 "무중력주의"로 설명하려 한다.

 

 

최울가의 회화에서 목격되는 해학은 희극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캔버스의 밑칠을 드러내는 것에서, 실재하는 관람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에서, 상반된 요소가 아우성대는 것에서 보듯이 비극 또한 허용된다. 형상이라는 포지티브가 결국 그의 최근작에서는 네거티브로 드러나는 것처럼 그러하다. 나는 비극이 허용되는 해맑은 최울가의 회화적 해학을 통해 그의 회화를 존재론으로 판독할 단서를 몇몇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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