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와 이미지의 약동과 충돌

울가(蔚家)는 울산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 이름이 본명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蔚家는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답고 깊이 있는 이름 중의 하나입니다. 저에게 그 울림은 너무 미묘해서, 울산역에서 반구대 암각화를 거처 통도사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마음속을 맴돌았습니다. 蔚家라는 이름이 끝없는 울림과 떨림으로 내 안에 잠들어있던 반구대와 통도사를 끌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는 7천 년 전 인류와 삼라만상의 존재를 증명하는 강렬한 시각적 텍스트로, 다른 하나는 천년고찰의 스님들이 그들을 깨우는 새벽예불 소리로, 이미 오랫동안 나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생물학적 진화와 비슷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문화적 진화의 단위를 설명하기 위해 ‘밈(meme)’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밈은 유전자(gene)와는 달리 생물학적인 방법, 즉 섹스를 통한 수직적 복제가 아니라, 모방이라는 수평적 방법을 통해 뇌에서 뇌로, 인간에게서 인간으로 복제되며 수천 년 동안 인류의 문명을 만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최울가의 작업과 반구대 암각화의 시각적 연관성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하고 명쾌한 방법입니다. 다윈과 도킨스의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이 둘은 고유의 문화적 유전자를 공유하면서도, gene과 meme의 공진화와 교직의 결과물로서, 각자의 시공간에 독자적으로 존재합니다. 둘 사이의 모방과 상상을 통해 인류의 삶과 문화가 동시대성을 구성하기도 하고,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설명입니다.

움베르토 에코 역시 중세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와 비슷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세상의 모든 책은 끊임없이 다른 책을 참조하고 있으며,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끊임없이 과거의 이야기들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서로 다른 텍스트들을 짜깁기하고, 과거 책들의 인용문을 조합하여 새로운 소설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그의 대표작 <장미의 이름>이 탄생했습니다. ‘우리는 난쟁이이지만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난쟁이다. 우리는 작지만 때로는 거인보다 먼 곳을 내다보기도 한다.’ 이 책에 나오는 에코의 이 유명한 비유는 유전적 요소와 문화적 요소 사이의 공생과 경쟁, 거인과 호미니드 사이의 긴장 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에코가 중세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글을 썼듯이, 최울가는 반구대와 통도사로 대표되는 우리 문명의 줄기세포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움베르토 에코와 최울가는 언어와 이미지를 무기로 거인의 어깨 위에서 춤을 추는 기호학자로 보여집니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을 쓸 당시 벤야민도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복제로 인해 작품의 아우라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우려와, 원본의 권위가 사라진 자리에 인간과 사회의 자유와 민주의 영역이 확대될 수 있다는 희망, 이 둘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예언처럼 지금 우리 시대에 원본은 시뮬라크르로, 아우라는 숭고로 대체되었습니다. 마침내 보드리야르는 원본과 이데아가 모두 사라진 세계, 그곳이 바로 새로운 세계의 출발점이라고 선언합니다. 복제 자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처럼, 그것은 부처를 향한 찬양이 아니라 대중을 향해 열려있는 텍스트입니다. 一者를 향한 성스러운 수직적 상승이 아우라라면, 숭고는 개별 주체의 몸과 마음을 관통하며, 고통과 전율을 통해서만 체험되는 경이로운 쾌감입니다. 원본과 아우라로의 회귀가 영원히 불가능함을 인식하는 바로 그 순간,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포한 바로 그 순간에, 판도라의 상자에 갇혀 있던 숭고가 우리 눈앞에 펼쳐졌을지도 모릅니다.

무한 복제와 무한 팽창, 무한 진화의 과정인 시뮬라크르는, 열역학 제2법칙과 진화론을 통해 우주의 기원부터 생명의 진화까지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현대 물리학이나 빅 히스토리의 발견과도 일치합니다. 최울가의 작업은 정확히 이 지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원본의 존재를 유추할 수 없는 무수한 존재와 형태들이 무한히 복제되고 무한히 팽창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업은 영원히 한 방향으로만 질주하는 시간의 화살처럼, 뒤를 돌아보거나 종합하거나 어떤 법칙으로 환원되지도 않은 체,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팽창하고 폭발하는 에너지에 떠밀린 작가는, 마치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난쟁이처럼, 현재라는 시간의 극단에 매달린 채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텅 빈 공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절대 無’의 세계와 마주합니다. 아직 시간과 공간마저 생성되지 않은 그곳은, 유기체가 견디기에는 지나치게 과도한 공포와 극단적인 오르가즘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아직 시공조차 전개되지 않은 절대 무의 공간인 자궁에서, 새로운 생명체와 이미지가 탄생합니다. 폭발하는 오르가즘으로 가득 찬 그곳에서, 우주의 탄생이 시작되는 빅뱅의 순간처럼 인간의 유전자가 첫 활동을 시작합니다. 자궁은 어느새 거대하고 신비한 우주적 공장으로 변모합니다. 최울가의 작업과 사유가 시작되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특히 에폭시 스티커로 화면을 겹겹이 채워나간 최근 작업은 마치 초신성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오는 에너지와 이미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화면은 에너지와 이미지의 약동과 충돌로 생성되는 시뮬라크르와 숭고의 공간입니다. 끝없이 팽창하고 진화하는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우주적 공간(space)이, 혼돈과 자유, 울림과 떨림, 공포와 쾌락으로 가득 한 경험적이고 인간적인 지구적 장소(place)로 전환된 곳입니다. 그곳은 태어남과 동시에 끊어진 탯줄처럼, 원본과 시뮬라크르, 언어와 이미지, 모방과 상상, 사피엔스와 우주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 혹은 영원한 상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최울가의 최근 작업에서 현대 물리학과 진화생물학의 성취뿐만 아니라, 죽음마저 넘어선 진화의 최후 단계, 호모데우스를 둘러싼 다양한 철학적 담론들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신이나 빅뱅의 순간을 보지도 증명하지도 못하듯이, 인간과 시뮬라크르의 미래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주가 어떤 윤리나 목적도 없이 그저 끝없이 질주하고 충돌하며 팽창하듯이, 이미지들의 운명도 그렇습니다. 최울가의 작업은 이 점을 다시 상기시킵니다. gene과 meme의 교직과 공진화가 끝없이 전개되는 화면 속에서, 결국 육신의 죽음으로 귀결될 자신의 ‘해체될 미래’마저 ‘영원한 현재’의 생성으로 찬미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그림 그리기는 우주적 판타지의 시뮬라시옹이자, 자기 존재의 파멸마저 응시하는 숭고의 자기전개과정입니다. 그것은 이데아나 아우라의 세계가 아니라, 사건과 기표들로, 고통과 환희로 가득 찬 맥시멀리즘의 세계입니다. 최울가의 작업은 그래서 본질주의와 엄숙주의로 대표되는 한국현대미술의 주류와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홀로 타국을 떠돌며 작업해온 그의 외로움이 작업에서도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지금은 그의 작업을 포함한 형상 미술 전반에 대한 합당한 평가와, 단색화로 과잉대표되어온 한국현대미술의 편향성에 대한 반성이 모두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그의 화면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들로 충만한 것처럼 한국 미술계도 더욱 다양하고 풍요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의 신작과 전시를 기다리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윤재갑 (Yun Cheagab, 큐레이터)